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진주성 전투 (문단 편집) == 역사적 영향 == 한국에서는 다른 두 대첩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는 조금 떨어지나, '''진주 대첩은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전쟁의 판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투'''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 진주 싸움의 충격이 너무 커서 김시민의 이름을 모쿠소(목사의 일본식 발음)라고 부르며 두려워했고, 2차 진주성 싸움이 바로 이 진주대첩의 복수를 위한 것인만큼 일본에게 준 충격은 다른 대첩들보다 크면 컸지 못하지 않았다. 징비록에 이 싸움이 상세히 기록되지 않아 사극등지에서 조금 덜 다루어지는 면이 있고, 왜란 종반까지 다른 두 대첩의 장군들은 지속적으로 활약한 반면 김시민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기에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면이 있으나 전투 자체의 극적인 면에서도, 전략적 중요성에 있어서도 삼대첩 중 단연 독보적이라 할 수있다. 진주전 당시 왜군 사망자는 지휘관 급이 3백 명, 병사가 1만여 명이 넘었고 왜군은 후퇴할 당시 사망자가 많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모든 시신을 불태워 화장하고 후퇴했다. 일본군 육군이 이정도의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기에 전투 하나만으로도 일본군의 기세를 꺾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이 전투로 왜구 수군과 육군이 짠 보급 작전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데, 만약 이때 패배해 전라도 방어선이 뚫렸다면 해상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던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마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거시 안목으로 볼때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을 사실상 조선의 승리로 결정지은 '''대단히 중요한 전투'''인 것이다. 게다가 주목받지 못하는 점이지만, 3천~4천 정도 규모의 조선군이 분투 끝에 10배에 가까운 머리수 열세를 극복한 것 자체로도 명량 해전 못지 않은 대단한 성과라 하겠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를 따라 소백 산맥이 이어져 있다. 현대에는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교통 수단이 발달해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있지만, 말 타고 걸어다니던 시절엔 좁은 산길을 따라 대규모 군대를 이동시키고 그에 필요한 보급품을 조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소백 산맥은 [[지리산]]을 포함한, 소위 백두대간이라 불리는 1차 산맥에 해당하는 험한 지형이기 때문에 왜군이 전라도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는 교두보인 진주성을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왜군은 [[남강]] 일대의 곡창 지대를 점령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이 전투로 계획이 산산조각나게 된다. 따라서 왜군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상륙전을 벌이지 않는 한 전라도를 점령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는데[* [[한산도 대첩|물론 그 해군들은...]] ], 나아가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본영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해전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전투가 가져온 후광이다.[* 이때 패배했더라면 의병들은 거병할 것도, 이순신이 바다로 나가 싸울 것도 없이 '''수군의 본영과 의병들의 민가가 잿더미가 됐을지도 모른다'''.] 즉,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온전히 보호하여 의병 활동과 이순신의 수군 전력을 유지시켜 준 대단히 중요한 전투'''로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대첩이란 단순히 크게 이긴 전투를 뜻하는게 아니라 전체적인 전쟁의 향방을 바꿀만큼 큰 영향력을 가져다준 전투를 의미한다. '''물론 크게 이기기도 했다.'''] 일본은 진주성에서의 참패에 분노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차전을 지시하면서 조선군의 승리의 주역인 김시민 목사의 목을 베어 오도록 명령하였고, 이는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보복전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2차 전투는 강화 협상 중의 심리전의 일환 및 보복의 성격이 강했으며, 일본군은 전라도 진출을 포기하고 진주성을 함락시키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공격했다.[* 당시 일본군은 6000명의 조선군을 상대로 거의 10만의 병력을 투입했다. 일본은 이 병력을 충당하려고 후방 점령군과 수군까지 긁어모았다.] 2차 전투에서 진주성은 함락되긴 했지만 조선군이 일본군 10만을 상대로 열흘을 버텼기 때문에 일본이 이기기는 했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피해가 났을거라는 추측을 해볼 수는 있다.[* [[공성전]] 특성상 공격측은 방어측보다 많은 전력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수적 우세를 차지하고도 공격부대가 섬멸당하는 경우도 흔하다.] [[일본]] 문학 중에 모쿠소 라는 괴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김시민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당시 일본군은 김시민의 이름은 모르고 직책인 목사만 알았다는 것과 2차 진주성 전투 때도 살아있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사공명주생중달]]-- 또한 논개가 일본 장수를 껴안고 강에 빠졌다는 전설도 이 때의 일이다. 그리고 현재 [[진주시]] 곳간을 살찌우는 대표 행사 [[진주남강유등축제]]의 기원이기도 하다. 진주 대첩 당시 왜군에게 진주성으로 지원군이 모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 한 교란 목적, 그리고 의병들에게 보내는 진주성 지원 요청, 가족들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남강에 종이 등을 띄워 보낸 것 등이 그 유래라 한다. 이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된 이후에는 순국한 이들을 기리면서 띄웠고 이 전통이 지금은 유등 축제로 이어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